“아니 그러니까, 언제냐고 그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 곧 오실꺼예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한 할머니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82
병동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거의 틀린 적이 없는 불길한 예감이 순간 몰려왔
고, 굳게 다문 입술 속에 고동치는 맥박을 숨긴 나는 어느새 간호사 station을 향해 조심
조심 걸어가고 있었다.
C. P. E. 지난여름 나는 그곳에서 임상사목교육(Clinical Pastoral Education)을 받고
있었다. 어린시절 주사바늘이나 알콜 냄새에 괜히 주눅 들고 떨리던 느낌처럼, 이유야
어떻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일단 병원을 찾아 다른 이들의 손에
내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영적 돌봄과 상담을 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상태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 이론보다는 실전을, 정해진 기법보다
는 상담자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더 강조하는 이 교육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CPE
Supervisor인 J모 신부님의 지도로 우리 교육생들을 더욱 힘들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CPE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이 뭐 하러 왔냐고 묻는 건 기본이고, 원무과 직원으
로 오해하신 환자나 가족들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병원에 대한 불만
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삐삐 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
도 하였고, 방금 임종하신 환자 곁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에게 사목적 대화를 하느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식은땀을 쥐어 짜 내기도 하였다. 정말이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
고 싶은 순간들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내가 맡은 구역인 내과중환자실, 외과중환자
실을 라운딩하고 마지막으로 82병동(외과병동)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8층 엘리베이터
에서 내려서는 참이었다. 소란이 일어난 곳을 가 보니 어제 입원하신 K할머니께서 간호
사 선생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친절한 상담자 모드로 말을 붙였다.
“아니 수술을 연기한데잖아. 내일모래 꺼정. 그러믄 진작 얘길 해 주던가. 어제밤부터
늙은이를 쫄딱 굼겨놓고 이제와서 연기한다면 어떻게 해. 내일모래 꺼정 병원비는 또 누
가 댈 꺼냐고. 그래서 의사선생님 좀 불러 달라니까 아까부터 온다온다 하고서는 코빼기
도 안 비잖아...... @@###***%%% ...... ”
갑작스런 병원일정으로 수술이 연기되자 화가 잔뜩 나신 할머니는 예상했던 대로 풍채
에 어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육두문자를 마구 담아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역동성! 우리는 흔히 이걸 "dynamic" 이라 부른다. 순간 그 할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dynamic 이 느껴졌다.
‘의사놈은 코빼기도 안 비고, 간호사년들은 들은 체도 안 하는데, 옳거니! 병원 출입증
을 달고 있는걸 보니 니놈도 한패렸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의 dynamic을 보듬어 주어야 할 상담가의 본분을 망각한 나는 어
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젠장, 잘 못 걸렸다. 좀 있다올걸. 모르겠다고 하고 그냥 자리를 피할까? 아니야, 상담
자가 내담자를 피하다니... 그건 안 돼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
는 게 없잖아. 내가 수술일정을 잡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건 할머니와 간호
사쌤 사이의 문제야.... 하지만... 그래도 내 담당 환잔데... ’
항상 환자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범위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
일까를 고민하였고, 또 도움 받은 환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이 큰 힘이 되
어 왔었는데, 이건 도무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더구나 대화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흥분상태에 있는 환자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
고 나의 무능함에 일순간 분노가 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발대발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오히
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까짓꺼!’
그리고는 다시 대화를 시도하였다.
“어휴~ 할머니 너무 속상하시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기다리셨는데.”
“아, 글쎄 내 말이... 늙은이가 얼마나 힘들겠냐고~ 밥도 못 먹고~”
초보 상담가의 어설픈 “감정반영”이 효과가 있었는지 할머니의 목소리 톤은 한층 낮아
지셨고 할머니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으셨다.
“총각이 어떻게 좀 안돼? 의사 선생님 좀 불러 줄 수 없어?”
순간 나의 무능함을 들켜버린 것 같아 움찔하였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
각에
“저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할머니. 죄송합니다. 일단 간호사선생님이 얘기하셨다니깐
저랑 같이 한번 기다려 봐요. 곧 오시겠죠.”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실로 들어갔고, 병동의 수많은 시선들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
다.
일주일 후, 할머니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푸욱 쉬신 다음 퇴원을 하셨다. 그날의 사건
이후 나는 일주일 동안 그 할머니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어릴 적 피난 가던 얘기
며, 어린나이에 시집가셨던 얘기, 자식 낳아 키우면서 고생하신 얘기 등, 병실을 방문할
때 마다 할머니판 인간극장 시리즈는 끝이 없었다.
그날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다행스럽게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처음에 할머니는 나에
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간의 기대를 하셨지만, 오히려 내가 현실적으로 도움
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시자 나를 병원직원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힘없고 약한 이웃으로 받아 들이셨던 것이다.
내가 경험한 기적은 물론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실 나는 비슷한 기적을 이미 한 가지
알고 있다. 2000년전, 유다 사람들은 그토록 하느님을 만나고자 애썼다. 기다리고 기다
리고 또 기다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바로 그 하
느님의 아들이란 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매달렸다. 하느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그러나 그는 무능하였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로마
로부터 해방시켜 줄 어떠한 힘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마저 지키지 못해 제대로 저
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이후 그는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있다.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도, 유명하
게 해 주지도, 성공하게 해 주지도 못하지만 변함없이 우리 곁에 앉아 눈빛을 마주치며
우리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경청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의 선교사 교육을 무사히 마치면 나는 “선교사” 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어 간다. 주위
의 많은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왜 하필 외국에 나가야 하냐고. 말
도 안 통하고 적응도 어려운 외국보다는 한국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으
냐고. 사실 나도 아직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어렴풋이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선교는 “함께하는 것” 이라는 것. “무엇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그
저 “언제까지나 함께 머무르는 것” 이라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함께 머무르기”
위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듯이 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
운 삶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지만 또 한편 그곳에서 경험하게 될 또 다른 기적들에 마
음이 설렌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 곧 오실꺼예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한 할머니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82
병동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거의 틀린 적이 없는 불길한 예감이 순간 몰려왔
고, 굳게 다문 입술 속에 고동치는 맥박을 숨긴 나는 어느새 간호사 station을 향해 조심
조심 걸어가고 있었다.
C. P. E. 지난여름 나는 그곳에서 임상사목교육(Clinical Pastoral Education)을 받고
있었다. 어린시절 주사바늘이나 알콜 냄새에 괜히 주눅 들고 떨리던 느낌처럼, 이유야
어떻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일단 병원을 찾아 다른 이들의 손에
내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영적 돌봄과 상담을 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상태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특히 이론보다는 실전을, 정해진 기법보다
는 상담자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더 강조하는 이 교육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CPE
Supervisor인 J모 신부님의 지도로 우리 교육생들을 더욱 힘들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CPE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이 뭐 하러 왔냐고 묻는 건 기본이고, 원무과 직원으
로 오해하신 환자나 가족들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병원에 대한 불만
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삐삐 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
도 하였고, 방금 임종하신 환자 곁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에게 사목적 대화를 하느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식은땀을 쥐어 짜 내기도 하였다. 정말이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
고 싶은 순간들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각설하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내가 맡은 구역인 내과중환자실, 외과중환자
실을 라운딩하고 마지막으로 82병동(외과병동)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8층 엘리베이터
에서 내려서는 참이었다. 소란이 일어난 곳을 가 보니 어제 입원하신 K할머니께서 간호
사 선생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친절한 상담자 모드로 말을 붙였다.
“아니 수술을 연기한데잖아. 내일모래 꺼정. 그러믄 진작 얘길 해 주던가. 어제밤부터
늙은이를 쫄딱 굼겨놓고 이제와서 연기한다면 어떻게 해. 내일모래 꺼정 병원비는 또 누
가 댈 꺼냐고. 그래서 의사선생님 좀 불러 달라니까 아까부터 온다온다 하고서는 코빼기
도 안 비잖아...... @@###***%%% ...... ”
갑작스런 병원일정으로 수술이 연기되자 화가 잔뜩 나신 할머니는 예상했던 대로 풍채
에 어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육두문자를 마구 담아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역동성! 우리는 흔히 이걸 "dynamic" 이라 부른다. 순간 그 할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dynamic 이 느껴졌다.
‘의사놈은 코빼기도 안 비고, 간호사년들은 들은 체도 안 하는데, 옳거니! 병원 출입증
을 달고 있는걸 보니 니놈도 한패렸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의 dynamic을 보듬어 주어야 할 상담가의 본분을 망각한 나는 어
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젠장, 잘 못 걸렸다. 좀 있다올걸. 모르겠다고 하고 그냥 자리를 피할까? 아니야, 상담
자가 내담자를 피하다니... 그건 안 돼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
는 게 없잖아. 내가 수술일정을 잡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건 할머니와 간호
사쌤 사이의 문제야.... 하지만... 그래도 내 담당 환잔데... ’
항상 환자들을 만날 때 마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범위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
일까를 고민하였고, 또 도움 받은 환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이 큰 힘이 되
어 왔었는데, 이건 도무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더구나 대화마저 불가능할
정도로 흥분상태에 있는 환자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
고 나의 무능함에 일순간 분노가 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발대발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오히
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까짓꺼!’
그리고는 다시 대화를 시도하였다.
“어휴~ 할머니 너무 속상하시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기다리셨는데.”
“아, 글쎄 내 말이... 늙은이가 얼마나 힘들겠냐고~ 밥도 못 먹고~”
초보 상담가의 어설픈 “감정반영”이 효과가 있었는지 할머니의 목소리 톤은 한층 낮아
지셨고 할머니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으셨다.
“총각이 어떻게 좀 안돼? 의사 선생님 좀 불러 줄 수 없어?”
순간 나의 무능함을 들켜버린 것 같아 움찔하였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
각에
“저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할머니. 죄송합니다. 일단 간호사선생님이 얘기하셨다니깐
저랑 같이 한번 기다려 봐요. 곧 오시겠죠.”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실로 들어갔고, 병동의 수많은 시선들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
다.
일주일 후, 할머니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푸욱 쉬신 다음 퇴원을 하셨다. 그날의 사건
이후 나는 일주일 동안 그 할머니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어릴 적 피난 가던 얘기
며, 어린나이에 시집가셨던 얘기, 자식 낳아 키우면서 고생하신 얘기 등, 병실을 방문할
때 마다 할머니판 인간극장 시리즈는 끝이 없었다.
그날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다행스럽게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처음에 할머니는 나에
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간의 기대를 하셨지만, 오히려 내가 현실적으로 도움
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시자 나를 병원직원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힘없고 약한 이웃으로 받아 들이셨던 것이다.
내가 경험한 기적은 물론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실 나는 비슷한 기적을 이미 한 가지
알고 있다. 2000년전, 유다 사람들은 그토록 하느님을 만나고자 애썼다. 기다리고 기다
리고 또 기다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바로 그 하
느님의 아들이란 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매달렸다. 하느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그러나 그는 무능하였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로마
로부터 해방시켜 줄 어떠한 힘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마저 지키지 못해 제대로 저
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이후 그는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있다.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도, 유명하
게 해 주지도, 성공하게 해 주지도 못하지만 변함없이 우리 곁에 앉아 눈빛을 마주치며
우리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경청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의 선교사 교육을 무사히 마치면 나는 “선교사” 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어 간다. 주위
의 많은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왜 하필 외국에 나가야 하냐고. 말
도 안 통하고 적응도 어려운 외국보다는 한국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으
냐고. 사실 나도 아직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어렴풋이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선교는 “함께하는 것” 이라는 것. “무엇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그
저 “언제까지나 함께 머무르는 것” 이라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함께 머무르기”
위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듯이 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
운 삶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지만 또 한편 그곳에서 경험하게 될 또 다른 기적들에 마
음이 설렌다.
[임상사목교육센터 사목일기 중-박정호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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