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일반

변이 디아스포라 시대의 영적 훈련

elderseo 2021. 3. 3. 21:44

변이 디아스포라 시대의 영적 훈련 / 2021년 신앙계 3월호 기획

-보낸사람조목사 21.02.27 10:30

"세상은 갈수록 개체화 되면서 한 영혼에 대한 개인적 돌봄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교회는 축제장이 되어야 한다. 고통에 억눌린 사람들이 죄의 묶임에서 풀려 자유를 노래하고, 어둠에 있던 자들이 진리의 빛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 아이들은 교회 앞마당에서 하루 종일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예배당 한 편 성가대 연습실로부터 성가대원들의 연습소리가 들려온다. 어른들은 싱글벙글 예배당 곳곳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신이 받은 은혜의 간증을 나누느라 열심이다. 저녁 부흥회 집회에서 어제처럼 또 다시 받게 될 뜨거운 은혜의 말씀을 사모하며 설렘과 기대감으로 서로가 사랑의 눈빛을 나눈다. 한국 교회 부흥 시기의 교회 모습들이다. 교회는 항상 잔칫날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모습은 장례식장을 방불케 하도록 조용한 적막에 싸여 있다. 코로나19로 모이지 못하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한국 교회는 축제장이 아닌 장례식장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그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득이나 잘 모이지 않는데 코로나19로 더 모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한국의 어린이 출생보다 노인의 사망자 수가 더 많아져 출산 저조로 말미암아 아동수가 급감하여 폐교하거나 통폐합 하는 학교가 시골 뿐 아니라 서울 도심에서도 발생되고 있다. 이러니 교회야 말할 것도 없다. 다음 세대를 이어 신앙을 전수받아야 할 아이들이 없는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해결해야 할 숙제는 한국 교회만의 고민과 숙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요, 더 나아가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지구상의 전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가운데 우리는 몸 뿐 아니라 마음도 멀어지고 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활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홀로서기를 강요하고 인간은 더욱 철저히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여야 한다(히 10:25). 그러나 사실 그동안 우리는 점점 모이기를 폐하여 왔다. 주일 예배 이외에도 수요 예배를 비롯한 금요 기도회와 새벽 기도회까지 다양한 여러 종류의 예배와 모임이 있었으나 이제는 축소될 대로 축소되어 주일 예배의 명맥만 유지하는 교회도 많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19가 활개 치기 한참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러니 코로나19를 탓할 것도 아니다. 이번 코로나19로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솔직히 그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은 게을렀고 나태해졌으며 영적으로도 녹슨 검의 날처럼 무디어 있어 영적 싸움에는 번번이 패배하고 마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앙 초기의 뜨겁고 순수한 열정이 식은 후로는 내 안에 새로운 부흥이 찾아오지 않았고 나 역시 이에 대한 회복의 갈망마저 없었다. 그러면서 주일성수의 개념 자체가 율법적으로 나를 구속하는 것같아 싫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비대면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제 갈등 없이 내 편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내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식대로 하면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해보니 잘 안 된다’이다. 점점 더 게으르고 나태한 신앙생활 속에서 내 신앙은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이 현재의 내 영적 상태의 진면목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게 스스로 믿을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율적이되 스스로 그 자율성을 통제하기까지는 철저히 비자율적으로 구속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이 말하는 세상 기준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진리 안의 자유를 찾아나서야 한다. 진리를 위해 스스로 찾아나서는 구속은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이고, 이 은혜는 철저히 율법의 준거(틀) 위에서 주어짐을 알아야 한다. 율법 밖에서는 은혜가 없다. 율법 안에 묶이어 율법의 속박을 체험한 뒤에야 은혜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가 세 발자국 밖에 걸을 수 없는 좁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스스로 두 발자국 안으로 활동반경을 정하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세 발자국 안에 가두었지만 나는 두 발자국으로 족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오. 내 걸음의 한계는 당신들이 아닌 나 스스로의 선택이 있을 뿐이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조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왜 나를 세 발자국 안에 가두어 두십니까?” 하고 원망 불평하기보다 겸허한 자세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 두 발자국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내와 현실의 포용력을 길러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은 우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 유례없는 전 세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세기말적 세계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실제적인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제 앞으로의 시대 변화를 예측하면서 미래 시대는 전체주의에서 개체주의로 변해가는 시류 속에서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종교도 조직체가 아닌 무형의 개인적 집합체로 움직여질 것임을 감안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준비를 위한 영적 훈련은 개인의 영성을 스스로 돌보는 묵상 훈련의 강화이다. 그리고 이 묵상은 사교로 빠지지 않도록 철저히 말씀과 기도 안에서, 무엇보다 실제적인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루살렘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지는 교회가 되었고,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가 열렸다. 아이러니컬하게 교회 사가들은 이 일로 인해 아시아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말한다. 지금 교회 역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반란과 공격으로 흩어지게 되어 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변이 디아스포라가 형성되고 있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새로운 슬로건이다. 교회도 그렇다.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교회가 이제 모임의 성격을 달리 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박해 속에서의 북한이나 중국의 가정 교회처럼 이 모든 핍박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개인의 영성 훈련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개인의 영성은 마치 사막의 교부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서의 묵상 훈련을 통한 외로운 자기와의 영적 싸움을 필요로 한다.

 

이제 모든 일들이 모여서 하기보다 흩어져 개별적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다. AI 시대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심에서 더욱 성과와 효과를 노리는 일 중심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목회 사역 역시 선교적 방식으로 오라 하지 않고 찾아가야 한다. 집으로 심방가지 않고 마음으로 찾아가 만나야 한다. 집단적으로 가르치려 하기보다 개별적으로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한 영혼을 돌보는 영적 돌봄(spiritual care)이 필요하다. SNS가 최고로 발달한 현 시대에서는 비대면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집단적이거나 대면으로서보다도 더 효율적이고 섬세한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갈수록 개체화 되면서 한 영혼에 대한 개인적 돌봄을 절실히 요구한다. 집단화가 아닌 개인적 영성을 강화시키는 훈련들이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네트워크도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조직체에 의존하기보다 개인적 묵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영적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고 교회는 이를 뒷받침 해주도록 해야 한다. 이제 우리의 영적 싸움은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피터지게 처절한 각개전투를 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인간의 공허와 소외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감성과 이성이 조화된 영성을 제공해 인간의 영혼을 깨우는 일을 해야 한다. 인간 스스로가 아니면 줄 수 없는,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그리고 인간에게 절대적 필요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영적 빈곤함을 채워줘야 한다. 이것이 인간관계가 상실되고 있는 현대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다리를 놓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요 역할이다.

 

 

                                                                 Abraham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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