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만약 인간에게 죽을 권리가 주어진다면?

elderseo 2015. 6. 22. 14:25

만약 인간에게 죽을 권리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맛있다' '맛없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먹던 시절에는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 맛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 언제쯤일까?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사라진 때부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 즉 결승선은 죽음이다.
경쟁이라면 대개 결승선에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한다.
그렇다면 빨리 죽는 것이 이기는 것일까?
석가모니도 사는 것은 고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태어나서 바로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인생은 무조건 오래 산다고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젊었을 적 내 주변을 둘러싼 죽음을 지켜보거나
현실로 다가온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그 사람만 세상에서 사라진 채
어제와 같은 오늘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사람은 죽으면 그저 사라질 뿐이다.
천국도 지옥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워진다.
"아아~~~, 죽었구나~~~" 그걸로 끝인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인생도 그렇게 쉽게 잊힐 만큼
텅 비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워지기도 했다.
그냥 살았었구나 하는 기억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을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우주라 불리는 전체의 티끌에 불과하고,
인간은 자신을 우주와 분리된 개체로 보며 살아가지만,
그건 시각적 착각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그런 착각이 인간을 고통의 감옥에 빠트리기도 하며,
비좁은 감옥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를
연민의 감정으로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도 했다.


물론 그런 완전한 경지에 이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비좁은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만으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육신이 죽어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미립자 에너지 형태로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 시키고 있다.
그의 눈엔 육신은 스쳐가는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슬퍼할 이유가 있는냐고 완곡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삶이 무서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안간에게 있어서 삶도 두려웠지만
죽음은 더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죽음은 매 순간마다 호시탐탐
모든 인간을 노리고 있으며,
사람은 누구든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인간의 유한성을
굳이 부인하려 들지 말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인간을 기다리는 것이 죽음이며,
어느 누구도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인간 생활의 모든 근심, 걱정, 모든 고통은
헛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만약 인간에게 죽을 권리가 주어진다면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될까?

 

 

경이롭게도 봄이란 녀석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한강둔치길에 벌써 봄꽃들이 지천이다.

봄까치, 민들레, 냉이꽃 등등...

모든 식물들의 부활을 알리고 있지만

어떤 때는 그런 부활이 좀 얄밉기도 하다.

만약 인간에게도 그런 부활이 존재한다면

그리 얄밉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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