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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밀>/마광수 - 엿보이는 것은 아름답다-

elderseo 2008. 4. 13. 04:55

 

<비 밀>/마광수 - 엿보이는 것은 아름답다-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른 여인이 긴 대나무 젓가락을 불편하게 쥐고
 음식물을 위태롭게 집어 올릴 때
 젓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엿보이는 비수처럼 뾰족한 핏빛 매니큐어,
 카드놀이를 할 때 카드 사이로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
 부채를 손에 쥐고 있는 여자,
 (이때 부채가 투명한 것일수록, 즉 차폐물(遮蔽物)이 무력하면 무력할수록 여자는 더
섹시하게 보인다)
 커다란 유리잔도 효과적인 차폐물,
 핑크빛 조명 아래서 커다란 와인 글라스를 통해 엿보이는 여인의 흰 가슴은 아름답다
 (투명한 유리잔은 깨지기 쉽다는, 또는 깨어지기를 원하는, 여인의 상징적 신호이다)


 사람을 차폐물로 써도 모든 것을 훨씬 아름답게 한다
 한 사람을 차폐물로 이용하면서
 또 다른 한 사람과 다소 안쓰럽고 감질나는 교제를 할 때
 즉 삼각관계 속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매력적으로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도 아름답다
 선글라스를 쓴 여인은 다만 자기의 시선을 남들이 엿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엿보여진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알몸뚱이조차 상상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는 쾌감이 있다


 양복깃을 올려 목과 얼굴을 살짝 가린 여자는 아름답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이마와 두 뺨을 가린 여자도 아름답다
 (업 스타일의 숏커트로 얼굴을 온통 드러낸 여자는 징그럽다. 무섭다. 너무 비밀이 없
다. 엿보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당당해 보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나는 엿보이고 싶다
 나는 엿보고도 싶다
 비밀은 언제나 아름답다


 <마광수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