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일반

석가 탄신일에 예수를 생각하며

elderseo 2021. 5. 22. 06:34

석가 탄신일에 예수를 생각하며

 

어제 석가 탄신일에 몇몇 지인과 더불어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입을 열어 마치 석가 탄신일에 맞춘 듯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나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 이른바 천주교의 냉담신자인 셈인데, 자기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중에 어느 실존 스님이 계신데 그 스님처럼 평온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얼굴이야말로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스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평온하고 인자한 얼굴의 표정과 느낌이 그대로 전해오는 듯했다. 그러면서 스님의 얼굴이 그럴진대 석가는 어떠했겠는가 하며 법당에 모셔진 부처상을 생각하였다. 거의 감긴 듯한 눈에 지그시 다문 입의 미소는 그 자체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 경지의 열반(nirvana) 상태를 연상시킨다.

 

대화중임에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몸이 나른해지는 가운데 몽롱함 속에서 부처의 평온한 미소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예수를 떠올리고 눈을 번쩍 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못 박힌 손과 발에서 그리고 머리의 가시관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얼굴이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온 이래 예수는 평온의 상징이기보다 고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이 예수가 현실이었다. 내가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예수의 고뇌는 바로 나의 고뇌로 연결되었다.

 

나는 종교비교학자도 아니요 목사라고 해서 타종교를 막무가내로 폄하해버리는 무뢰한도 아니다. 다만 내가 붙들고 있는 예수를 생각하는 시점이 석가 탄신일이어서 자연스레 비교가 되는 듯하다. 석가와 예수는 이 땅에 태어난 출생 환경부터가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출생 신분부터가 왕족과 평민이다. 그리고 성장 배경 역시 왕궁과 시골 작은 마을이다. 석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왕족의 신분을 저버리고 고행의 수도 길에 올랐고 결국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 민생들에게 설법을 깨우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 때문에 죽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 받는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과 함께 죽었다. 내 집 거실 벽의 중앙에 걸려 있는 나무 십자가의 예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형편없는 몰골이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그 십자가를 향해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린다. 그 일그러진 몰골의 고뇌에 찬 예수 얼굴을 바라보며.

 

석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보리수의 열반에 들어갔다. 나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이다. 그래서 나와는 큰 거리감이 있다. 내가 할 수도 갈 수도 없는 곳에 그가 있기에 그건 내 현실이 아니다. 다만 인자하신 미소의 부처상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내게 평안보다는 뭔가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렁거림으로 내 몸을 꿈틀거리게 한다. 그런데 이게 힘들다. 그렇지만 이 고통의 과정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표현키 어려운 희열의 환희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때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석가와는 달리 예수는 부활의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미완성의 삶이었던 듯 생각된다. 인류 구원의 대업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죽음의 잔이 지나치기를 위해 기도했으며, 막상 십자가에 달려 죽음 직전에 이르자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의 절규를 내뱉으며 죽어갔다. 그리고 예수는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오늘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해프닝에 끝날 뿐으로 예수의 삶은 실패자의 삶으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예수가 좋다. 그래서 이 예수가 좋다. 그의 고뇌에 찬 인간적 어수룩함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친밀감이 있다. 죄인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심이 감사할 뿐이다. 인간의 고통과 번뇌에서 해탈한 완성의 삶이 아니라 미완성인 채로 달려가야 할 길 그 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의 삶에 있기에 마음이 편하다. 어차피 우리 모두 길 위의 존재이니까. Being on the Way!

 

                                                                                                                                 Abraham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