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잼있는 글들
배우 윤여정
elderseo
2021. 4. 27. 02:15
[배우 윤여정 ]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을
봤다.
'브래드 피트'가 미나리 제작사 인 걸 알게
됐고, 그가 시상을 맡았다.
1980년대 병아리 감별사 이민 가정의
미국 이주 정착기를 그린 독립영화였다.
그러니 배우가 자기 돈 내고 비행기 타고가
찍었단 말이 나왔다.
인생을 살면서 반듯하게 표현해 내는
이 늙은 배우의 연기를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미나리' 순자 할머니를 연기한 윤여정 배우에 대한 생각을 올린다.
영화 속 순자 할머니가 내 할머니와 같다.
그립고 그립다.
70대 중반의 늙은 배우의 뛰어난 영어
인터뷰에도 놀라고, 만난지 50년이 넘은
첫 김기영감독에게 이 상을 받친다는
멘트에 또 놀랬다.
겸손함과 위트가 뒤섞인 장면을 본다는 건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보다니, 힘이 솟는다.
작년에는 기생충으로 행복했고, 올해는
윤여정이다.
"내 이름 잘 못 부른 사람들, 오늘 만큼은
용서 하겠다" 수상식장에서 전 세게인이
보는 화면을 보고 순자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정이삭 감독의 실재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는데 아칸소주에 살았던 기억을 쫒아
특정시간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남을 쫓아가는 걸 멈추고 나의 일을 기억
하기를 시작하니 인생과 일에서 많은 것 들이 바뀌었다".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시인들과 소설의
한 대목, 한 구절을 조합해 가며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대본은 이렇게 탄생했다." 감독의 말이다.
할머니 전성시대다. 할매 스타일이 인기다.
할머니는 할 말은 당당히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남 눈치보지말고 살아"
"옷 입는 데 남의 눈치 볼 거 뭐 있니"
"니 마음대로 사세요"
윤여정이 무심한 듯 대사를 툭 톡 던지는
영상이 뜬다.
10대~20대 여성이 많이 이용하는 패션
온라인 광고다.
1980년대 한인 가정의 미국 이주 정착기를
그린 미국 독립영화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전 이야기이다.
문학은 현실의 삶을 배끼는 것이다.
작품 속 순자할머니는 실재 외할머니이고
윤여정이 연기해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
4관왕 '기생충'도 쓰지 못한 역사를 썼다.
"브래드 피트"가 회사를 차려 제작했다.
제작자 대표인 '브래드 피트'가 시상을했다.
"브래드 피트를 드디어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찍을때 어디 계셨나?"
"내가 21살때 만나 24살때 '화녀'라는 작품에서 만났던
내 첫 감독님인 김기영님께 감사 드린다."
마지막 수상 소감의 멘트에 50년 전에 만나
고마움도 모르고 살다 60넘어 돌아가시고
나서야 위대한 감독인 걸 알게됐다.
늘 미안하고 애닮다 늙어서 만난 정이삭 감독을 보며 다시 희망을 보았다.
김기영 감독이 더 생각이 났다
누구에게든 특히 스텝을 존중하는 정이삭
감독과 작업하면서 세련된 43살, 내 자식
보다 어린 감독에게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살면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 부럽겠는가.
"나는 이제 감사 할 줄 아는 나이가 됐다.
인생을 살면서 배반을 너무 당해 누굴 믿지 도 않지만 이 젊은 감독을 만나 희망을 보았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윤여정의 생각, 말. 나는 이런 연륜이 좋다.
배우의 솔직하고도 유머러스한 '말'.
'나이가 드니 욕망이 줄어 든다.
그래도, 설래임 만은 간직하고 싶다'
"이번 상은 고상한 체 하는(snobbish)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 기쁘다"고 말해
시상식 소감 중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노 배우는 71년 가정부로 들어가 부인이
친정에 애 낳으러 가자 주인 집 사장과
사랑을해 아이를 갖고 유산 시키며 불 '화'
화녀를 연기하면서 우리 곁에 왔던 배우다.
그때 만난 김기영 감독의 계약조건이
"매일 두 시간 이상 만나야 한다는 조건에
이상하다 생각했다.
매일 만나 식사하러 다니고, 영화보고, 얘기
하고, 촬영이 들어가서야 이해하게됐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TV 탈랜트가 신종
직업일때 옆 집 김재형 PD만나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가건물 지어 방송국 만든 걸
처음 견학한 후 연기를 했다.
1960년대였다. 매일 구박 받고 매일 울고
그렇게 내 청춘은 갔다"
"김수현작가 만나 두 편 찍고 인기 좀 오를때 결혼해 이민 갔다"
"미국으로 이민가 13년 살면서 두 사내아이
키우며 살때가 가장 행복했다.
티비도 보고 영화도 보고 참 행복하게 살다.
어느 날,
이혼하고 돌아와 가장을 해야했다,
나, 연기 비결 없다. 먹고 살기위해 밤 새워
대본 외우고 연습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먹고 살려고 연기했다. 참 힘들고 고달팠다.
그만큼 절실했지 무슨 연기 철학이 있는 건
생각 못해 봤다."
혼자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면서 연기를
배웠다. 생생한 주인공들의 꾸미지 않는 삶의 연기를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 갔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윤여정의 다정하고 산뜻한 모습을 보며 할머니 배우에게 지금 세계인들이 열광하고있다.
'미나리' 영화는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는 철학이 몸에 밴
한 노인이 스크린 속으로 '스윽' 자기 인생을
끌고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 이민의 고단함을 경험했던 배우가 윤여정이라는 한 개인의 사적 매력
까지 스며들게한 아름다운 방문객을 보며
크게 위로 받고있다.
지금 세계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싱싱하고
편견 없는 할머니 배우에게 열광하고 있다.
1980년대 미국에 정착한 정이삭 감독의
아버지 정한길(75)과 어머니 정선희는 지금도
남부 아칸소 농장에서 살고있다.
영화에서처럼 채소 밭을 일구기 위해 손수
트랙터를 몰고 땀 흘리고며 산다.
영화는 일곱 살 소년이였던 정 감독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재구성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래서 문학의 정의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민 1세대인 정감독이 7살 꼬마 아이일때
부모님의 부부싸움 하던 장면과 당시의 옷, 소도구들을 모두 기억하고있다고 했다.
미국 최고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하기 직전에 가족 앞에 먼저 영화를
보여주자," 엄마가 먼저 울고 나도 따라 울고 온 가족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
말했다.
한인 가정의 고단한 이민사가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든 셈이다.
실제 배나무를 재배해 키우다 창고에
불이나 배나무 3000그루의 절반이 타고
말았다는 데목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일곱 살 소년이었던 정 감독이
보인다. 내 어린 시절을 소환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일어나 존경을 보낸다.
2021. 04. 26. 권영주.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을
봤다.
'브래드 피트'가 미나리 제작사 인 걸 알게
됐고, 그가 시상을 맡았다.
1980년대 병아리 감별사 이민 가정의
미국 이주 정착기를 그린 독립영화였다.
그러니 배우가 자기 돈 내고 비행기 타고가
찍었단 말이 나왔다.
인생을 살면서 반듯하게 표현해 내는
이 늙은 배우의 연기를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미나리' 순자 할머니를 연기한 윤여정 배우에 대한 생각을 올린다.
영화 속 순자 할머니가 내 할머니와 같다.
그립고 그립다.
70대 중반의 늙은 배우의 뛰어난 영어
인터뷰에도 놀라고, 만난지 50년이 넘은
첫 김기영감독에게 이 상을 받친다는
멘트에 또 놀랬다.
겸손함과 위트가 뒤섞인 장면을 본다는 건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보다니, 힘이 솟는다.
작년에는 기생충으로 행복했고, 올해는
윤여정이다.
"내 이름 잘 못 부른 사람들, 오늘 만큼은
용서 하겠다" 수상식장에서 전 세게인이
보는 화면을 보고 순자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정이삭 감독의 실재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는데 아칸소주에 살았던 기억을 쫒아
특정시간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남을 쫓아가는 걸 멈추고 나의 일을 기억
하기를 시작하니 인생과 일에서 많은 것 들이 바뀌었다".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시인들과 소설의
한 대목, 한 구절을 조합해 가며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대본은 이렇게 탄생했다." 감독의 말이다.
할머니 전성시대다. 할매 스타일이 인기다.
할머니는 할 말은 당당히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남 눈치보지말고 살아"
"옷 입는 데 남의 눈치 볼 거 뭐 있니"
"니 마음대로 사세요"
윤여정이 무심한 듯 대사를 툭 톡 던지는
영상이 뜬다.
10대~20대 여성이 많이 이용하는 패션
온라인 광고다.
1980년대 한인 가정의 미국 이주 정착기를
그린 미국 독립영화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전 이야기이다.
문학은 현실의 삶을 배끼는 것이다.
작품 속 순자할머니는 실재 외할머니이고
윤여정이 연기해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
4관왕 '기생충'도 쓰지 못한 역사를 썼다.
"브래드 피트"가 회사를 차려 제작했다.
제작자 대표인 '브래드 피트'가 시상을했다.
"브래드 피트를 드디어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찍을때 어디 계셨나?"
"내가 21살때 만나 24살때 '화녀'라는 작품에서 만났던
내 첫 감독님인 김기영님께 감사 드린다."
마지막 수상 소감의 멘트에 50년 전에 만나
고마움도 모르고 살다 60넘어 돌아가시고
나서야 위대한 감독인 걸 알게됐다.
늘 미안하고 애닮다 늙어서 만난 정이삭 감독을 보며 다시 희망을 보았다.
김기영 감독이 더 생각이 났다
누구에게든 특히 스텝을 존중하는 정이삭
감독과 작업하면서 세련된 43살, 내 자식
보다 어린 감독에게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살면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 부럽겠는가.
"나는 이제 감사 할 줄 아는 나이가 됐다.
인생을 살면서 배반을 너무 당해 누굴 믿지 도 않지만 이 젊은 감독을 만나 희망을 보았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윤여정의 생각, 말. 나는 이런 연륜이 좋다.
배우의 솔직하고도 유머러스한 '말'.
'나이가 드니 욕망이 줄어 든다.
그래도, 설래임 만은 간직하고 싶다'
"이번 상은 고상한 체 하는(snobbish)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 기쁘다"고 말해
시상식 소감 중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노 배우는 71년 가정부로 들어가 부인이
친정에 애 낳으러 가자 주인 집 사장과
사랑을해 아이를 갖고 유산 시키며 불 '화'
화녀를 연기하면서 우리 곁에 왔던 배우다.
그때 만난 김기영 감독의 계약조건이
"매일 두 시간 이상 만나야 한다는 조건에
이상하다 생각했다.
매일 만나 식사하러 다니고, 영화보고, 얘기
하고, 촬영이 들어가서야 이해하게됐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TV 탈랜트가 신종
직업일때 옆 집 김재형 PD만나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가건물 지어 방송국 만든 걸
처음 견학한 후 연기를 했다.
1960년대였다. 매일 구박 받고 매일 울고
그렇게 내 청춘은 갔다"
"김수현작가 만나 두 편 찍고 인기 좀 오를때 결혼해 이민 갔다"
"미국으로 이민가 13년 살면서 두 사내아이
키우며 살때가 가장 행복했다.
티비도 보고 영화도 보고 참 행복하게 살다.
어느 날,
이혼하고 돌아와 가장을 해야했다,
나, 연기 비결 없다. 먹고 살기위해 밤 새워
대본 외우고 연습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먹고 살려고 연기했다. 참 힘들고 고달팠다.
그만큼 절실했지 무슨 연기 철학이 있는 건
생각 못해 봤다."
혼자 "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면서 연기를
배웠다. 생생한 주인공들의 꾸미지 않는 삶의 연기를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 갔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윤여정의 다정하고 산뜻한 모습을 보며 할머니 배우에게 지금 세계인들이 열광하고있다.
'미나리' 영화는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는 철학이 몸에 밴
한 노인이 스크린 속으로 '스윽' 자기 인생을
끌고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 이민의 고단함을 경험했던 배우가 윤여정이라는 한 개인의 사적 매력
까지 스며들게한 아름다운 방문객을 보며
크게 위로 받고있다.
지금 세계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싱싱하고
편견 없는 할머니 배우에게 열광하고 있다.
1980년대 미국에 정착한 정이삭 감독의
아버지 정한길(75)과 어머니 정선희는 지금도
남부 아칸소 농장에서 살고있다.
영화에서처럼 채소 밭을 일구기 위해 손수
트랙터를 몰고 땀 흘리고며 산다.
영화는 일곱 살 소년이였던 정 감독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재구성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래서 문학의 정의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민 1세대인 정감독이 7살 꼬마 아이일때
부모님의 부부싸움 하던 장면과 당시의 옷, 소도구들을 모두 기억하고있다고 했다.
미국 최고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하기 직전에 가족 앞에 먼저 영화를
보여주자," 엄마가 먼저 울고 나도 따라 울고 온 가족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
말했다.
한인 가정의 고단한 이민사가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든 셈이다.
실제 배나무를 재배해 키우다 창고에
불이나 배나무 3000그루의 절반이 타고
말았다는 데목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일곱 살 소년이었던 정 감독이
보인다. 내 어린 시절을 소환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일어나 존경을 보낸다.
2021. 04. 26. 권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