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 행복론-보낸사람-조목사
역설적 행복론-보낸사람 조목사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인 Yuval Noah Harari일 것입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로서 오히려 성경의 권위 밖에서 신학적 관점이 아닌 철저히 사회 변화에 따른 역사적 관점으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나가는데 어느 구석 하나 막힘이 없습니다. 특별히 그가 역사학자로서 주목을 받는 것은 과거만을 열거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인간에게 다가올 미래를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우리의 현실에 맞도록 리얼하게 풀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는 거대한 역사적 담론에만 매달려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대사회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그러나 가야만 하는 미래 미지의 세계를 조금씩 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대 과학의 발전에 따른 인간 문명의 긍정적 평가를 말하면서도,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없기에 인간이 허무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부정적 견해를 밝히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인데, 이 행복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행복론은 독특합니다. 무신론 유대인이지만 유대교 안에서 자란 탓인지 현대를 향해 신의 경지에 오르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돈과 권력의 힘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으나, 막상 그 힘을 소유한 후에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행복해지는지 모르기에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인간의 한계가 있고, 인간의 불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행복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이며, 자신이 바라는 바의 기대치에 의해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기독교인의 경우 그것은 명백한 진리로 곧장 연결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이런 죄인을 구속해주신 하나님 은혜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게 되기 때문압나다. 반대로 불행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죄인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얼마나 엄청난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기에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출발이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라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게 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돈이 많을 때? 권력을 휘두를 때? 잘 생기고 머리도 좋고 재주도 좋아 주위에서 인정받고 인기가 좋을 때? 아니면 평생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건강의 자신감으로 힘이 펄펄 넘칠 때?...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느 한 사람도 과거의 그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은 행복 아닌 행복같은 풍족감에 도취되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예 생각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으니까요.
소위 말해 잘 나가던 그 시절을 '좋았던 한 때였다'고 말할지언정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 행복했노라고 말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어느 때에서야 우리는 그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행복은 안타깝지만 세인의 눈에 행복처럼 보여지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만한 아무것도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물질(소유)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분명 존재하는 의식의 가치(기대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소유했을지라도 내 의식에서 그것에 대한 가치를 기대치로 내세울 수 없다면 그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은 마음으로 전달되어 느껴져야 합니다. 소유로 인해 느껴지는 행복감은 즐거움과 짜릿한 쾌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일 뿐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싫증을 내며 곧바로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유에 의한 행복은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공중에 떠있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경험한 것만 기억하고 또 이로 인해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식만으로는 변화를 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그 맛(?)과 결과를 알기에 다시 시도하며 변화를 추구합니다. 어떤 경험과 기억이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의식을 일깨웁니까? 고난 중에 있을 때입니다. 고난 중에서 인간은 그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생각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있지만 이러한 아픔을 통해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가운데 자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은 생각하게 합니다. 고난의 흔적은 생각의 깊이로 측정됩니다. 행복은 내 의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느껴지며 육체적 즐거움보다는 정신적 기쁨으로 승화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로 인해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오히려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즐거움은 갈수록 목이 말라 새로운 것을 찾지만, 기쁨은 갈수록 내 안 깊은 곳으로부터 채워지는 충만감으로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하며 행복감을 느낍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준 근원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 신만이 줄 수 있는 신(영)적 충만감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역설적 행복론입니다.